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코 디 로마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6세기 초인 서기 1520년대의 [[유럽]] 대륙은 [[종교개혁]]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[[가톨릭]]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. 더욱이 동쪽으로는 [[이슬람]] 세력인 [[오스만 제국]]이 1526년 동유럽 최후의 보루인 [[헝가리 왕국]]을 [[모하치 전투]]의 대승을 통해 멸망시키고, 유럽 내륙까지 진출해 있었으며, 교황령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유럽 최대의 양대 세력인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[[카를 5세]]와 [[프랑스 왕국]]을 지배하고 있었던 [[발루아 왕조|발루아-앙굴렘 가문]]의 [[프랑수아 1세]]가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었다. 이를 '''[[이탈리아 전쟁]]'''이라고 하는데, 황제 [[카를 5세]]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했으므로 '''프랑스 vs 신성 로마 제국+스페인'''의 구도였다.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었던 40대의 젊은 교황 [[클레멘스 7세]][* '위대한 로렌초'라 불리는 '''[[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]]'''의 동생 [[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]]가 파치 가의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기 전에 관계하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. 그나마도 줄리아노 사후에 태어난 사생아였지만, 백부인 로렌초가 그를 조카로 인정하여 아들들과 함께 키웠다.]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. 클레멘스 7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합스부르크에 맞서 [[프랑스 왕국]], [[잉글랜드 왕국]], [[베네치아 공화국]], [[밀라노 공국]], [[피렌체 공화국]]를 끌어모아 '''코냑 동맹'''을 창설했다. 즉 '''[[합스부르크 가문]] vs 反 제국 연합'''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었다. 이미 1525년의 '''[[파비아 전투]]'''에서 제국군에게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자력만으로는 제국과 맞설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,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잉글랜드의 왕 [[헨리 8세]] 튜더조차 이를 놓칠 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했다.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. 코냑 동맹은 [[십자군 전쟁]]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라 할 만했다.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을 '''코냑 동맹 전쟁''' 또는 '''제5차 이탈리아 전쟁'''이라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